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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군사 흔적을 찾아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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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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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4 오후 3:4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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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시대 군사 흔적을 찾아서 - 이보름(민주시민교육원 나락한알)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가덕도의 토치카를 보기 위해서는 물때를 맞춰야한다. 토치카가 가덕도 대항 해안가에 있어 썰물이 되어야 건너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확한 물때에 맞춰 가덕도 외양포까지 갈 수 있는 교통편도 없어 두 번째 ‘말보다 건축, 생각보다 산책’은 날짜를 잡기도 어렵고 적당한 크기의 차량을 구하기도 어렵고 함께 기행을 떠나고자 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할 수 없어 죄송했다. 그런 수많은 어려움(?)을 딛고 봄날의 햇살이 따뜻한 4월9일 토요일 오후, 15명의 시민들과 함께 드디어 가덕도로 출발한다. 외양포로 가는 길은 홍순연 박사의 우려대로 25인승 버스가 지나가기에는 너무나 아슬아슬한 길이었다. 15인승 봉고가 겨우겨우 힘겨워하며 언덕을 넘어가니 깜빡 졸던 사람들도 번쩍 눈을 떠 주변을 살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터널처럼 언덕길을 넘어가니 횟집과 민박도 보이지 않고 몇몇 가구들이 소박하게 살아가는 작은 마을, 외양포 마을이 나타났다. 집들이 서로 담으로 구분해두지 않고 집 앞 작은 텃밭에 담을 대신해 상추, 감자, 고추 등을 심어두어 그냥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평화스러운 느낌이다. 하지만 1904년 외양포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임시 군사기지로 설정하여 민가 64호를 강제 퇴거시키고 러시아함대와 해전을 대비한 군사기지였다. 외양포는 1905년 진해만요새 사령부가 옮겨와 대대 규모 이상의 포병부대 주둔지로 확대되고 이는 1909년 마산으로 사령부가 이전되기까지 이어진다. 1914년에는 진해군항으로 사령부가 이전하면서 외양포 요새는 중포병대대 주둔지로 격하되어 1945년 일본 패망까지 유지되다 광복 후에야 비로소 이주민들이 들어와 군막사 등의 시설을 개조하여 현재까지 살고 있단다. 현재 외양포 마을에는 일제시대에 구축한 군사시설로 추정되는 구조물이 총 30개소 있으며 막사 14개동, 창고 8개동, 우물 및 기타 구조물 8개소, 포진지 등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포진지 입구로 들어서니 특이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는데 공동화장실이란다. 중국의 칸막이 화장실을 상상하면 “아!”하는 깨우침이 들면서 화장실 규모가 작지 않은 것으로 보아 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 했구나 싶었다. 포진지 안에는 엄폐막사 2개소, 탄약고 3개소와 탄약고 사이에 2개씩 포좌를 설치하여 총 6문의 280mm 유탄포를 배치했다고 하는데 홍순연 박사가 마을주민들이나 여러 전문가들을 인터뷰해보니 280mm 정도의 유탄포를 발사할 수 있을 정도의 진지 크기가 아니라 포병을 훈련하는 훈련기지가 아닐까 추정하지만 아직까지 연구된 기록은 포진지로 기록되어있어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막사와 탄약고는 진입구를 제외한 사면을 구릉으로 처리하고 상부에 대나무와 잔디 등을 심어 은폐하였다. 맞은편에는 엄폐막사가 있는데 언덕모양으로 된 두꺼운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재미있는 것은 꼬마들이 그림을 그려놓은 듯 네모난 창문을 그려두었다는 것이다. 군사시설이라도 어느 정도 미적 감수성을 가지고 구축한 것일까? 게다가 당시로서는 가장 튼튼하게 건축하는 형태였던지 콘크리트에 자갈을 섞어 단을 만들고 그 위를 벽돌로 덮고 또 흙을 덮고 대나무와 잔디를 심었다. 1904년 연내에 모든 구조물을 건축했다는데 모르긴 몰라도 당시로서는 엄청난 공사였음이 분명하다. 포진지를 둘러보고 뒤쪽으로 난 산길을 올라갔다. 좁은 산길을 한참 올라가니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콘크리트 줄기초만 남아있었는데 일본군이 군사시설로 설치하여 화약고로 사용한 곳이라고 한다. 줄기초를 둘러싼 석축의 우측면은 화강석 석축이 있었는데 원래는 나머지 사면도 화강석 석축이 쌓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변에 완전하지는 않지만 무너진 석축이 남아있었다. 산을 여기저기 둘러보면 길이 아닌듯한 좁은 산길이 있고 그 끝에는 꼭 공터가 있어 무언가 일제시대 군사시설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데 당시 화약이 중요한 군사물품이었기 때문에 사방으로 석축을 쌓아 쉽게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도 오래전부터 이런 흔적들을 알고 있었다지만 정확하게 어떤 시설이었는지는 조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면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현재 이곳 외양포는 일제가 떠나가고 우리 해군이 관할하여 아직 군사지역이다. 따라서 지역주민들도 해군지역에 얹혀 살아가는 입장이라 적극적으로 일제시대 군사시설에 대해서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산을 내려와 마을을 둘러보았다. 현재는 마을 주민이 살고 있는 집 같았는데 ‘사령관실’이고 ‘병사’라고 했다. 물론 증축도 되고 변형되었지만 큰 기본 틀은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기본적인 식수를 위해 우물도 곳곳에 남아있었는데 현재는 마을 주민들이 생선을 손질할 때나 가끔 사용한다고 한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여기저기 일제시대 흔적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신기하기도 하고 쉽게 올 수 없는 곳이라 더 기행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토치카를 보기위해 대항으로 이동하면서 들으니 가덕도 신공항 부지에 이곳 외양포가 포함되어 있어 아마도 공사가 본격화되면 이 흔적들은 모두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대항으로 넘어가는 언덕 옆에는 도로공사가 한참이다. 물때를 30분정도 늦어 서둘러 해안 길을 따라갔다. 10여분을 울퉁불퉁한 돌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니 인공동굴이 보인다. 당시 일본은 해안을 따라 동굴을 파서 토치카로 활용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꽤 넓어 충분히 무기를 숨기고 충분히 병사들이 생활할 수 있을만했다. 그래서인지 일부 지역에서는 전쟁이 끝난 한참 후까지 토치카에 병사들이 일제의 패망을 모른채 남아있었다고 한다. 제주도까지 가지 않더라도 가덕도에서 이렇게 토치카의 흔적들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 인상적인데 어떤 곳은 파다가 실수했는지 중도에 그만 둔 곳도 있고 생각보다 깊게 들어가는 곳도 확인할 수 있다. 외양포와 토치카를 모두 둘러보고 마지막에 나눈 이야기는 역시 “이런 근대건축 유산을 어떻게 하면 지켜낼 수 있을까?”다. 모두의 편의를 위해 공항을 만들더라도 역사의 흔적을 표지석 달랑 하나 남기고 없애버리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부디 다른 곳으로 옮기더라도 일제시대의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결론지어지길 기행에 참여한 모두와 함께 빌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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