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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채 사진
  • 이름: 박현채
  • 당시 나이: 61
  • 박현채 선생은 외세를 배제하고 민족자립 경제를 주창한 남한의 대표적 민족경제학자였으며, 70-80년대 가혹한 민주화운동 탄압기간 동안 민주화 운동가로, 빼어난 경제평론가로 활동하며 많은 고난을 겪은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동지는 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16살의 나이에 빨치산으로 입산했다가 52년 8월 복부 관통상을 입고 하산, 55년 서울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한국농업문제연구회' 간사로 있으면서, 자본주의 세계경제하에서 한국 국민경제의 독자적 존재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이론의 온상지 역할을 했다. 64년 박현채 선생은 소위 `인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어 도예종 은닉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1년을 선고받고 복역했고, 이후 두차례 복역과 구금을 당했다. 동지의 민족경제론은 한국 자본주의가 종속의 길로 치닫던 시기에 민족의 자주성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해 7-80년대 민중운동 속에서 중요한 가치를 제공했다.
  • [프로필]
    1934년 11월 3일 전남 화순군 출생 1947년 광주수창국민학교 졸업. 독서회 활동,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 실천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였음 1947년 광주서중학교 입학, 민애청 활동 1950년 10월 - 1952년 8월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 1955년 전주고등학교 3년에 편입, 졸업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입학 1963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강사, 인혁당 사건으로 중단. 1979년 '임동규간첩사건'에 연루되어 1년 복역 1980년 '134인 지식인선언'에 참가 1989년 조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취임 '민족경제론의 기초이론' 출판 1995년 8월 16일 뇌줄증으로 쓰러져 투병하다 운명
성순희 사진
  • 이름: 성순희
  • 당시 나이: 55
  • 성순희 동지의 삶과 죽음은 그 가족의 역사이기도 하다. 4·19때부터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쳐온 손병선 선생과 민주화, 노동운동 등에 헌신하고 있는 세 딸의 뒷바라지로 한평생을 살아온 동지의 고난과 역경의 삶은 이 시대가 낳은 또 하나의 어머니상이 아닐까.
  • [프로필]
    1938년 9월 부산 영도 출생 1958년 부산 남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 1959년 3월 1일 손병선씨와 결혼 1960년 4월혁명 때 앞장선 남편이 5·16 쿠테타 이후 투옥되자 생선장사를 하며 남편 옥바라지를 함 1989년 10월 큰딸 민옥이 해직되자 전교조 교사가족회 서울지역회장, 전국 부회장 맡음 1992년 9월 26일 남편이 안기부에 연행 후 수배생활을 시작 1993년 7월 7일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1993년 8월 15일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손구용 사진
  • 이름: 손구용
  • 당시 나이: 28
  • 김순복,손구용 두 동지는 1994년 2월 1일 "UR재협상, 국회비준 거부, 농업대개혁 쟁취를 위한 전국농민대회" 참석을 위하여 진양군 농민회 사무실에서 아침 6시 25분경 서울로 출발하여 전농의 지침에 따라 도방송차량을 가지고 올라가야 했다. 이 방송차량을 손구용, 김순복 동지가 맡기로 하고, 진양군 농민회 본대 버스 뒤를 따라 손구용 동지가 운전하는 1톤 트럭이 진주→김천 방면으로 동시에 출발하였다. 신청군의 도로는 전날 내린 비와 눈으로 얼어 빙판길이었다. 두 동지가 탄 차량이 경남 함양군 수동면 내백리 남효부락앞 S자형 커브지점 빙판길에서 미끄러져 반대편 언덕쪽으로 추락지점에서 느티나무(지름 약 30㎝)와 충돌하여 김순복 동지는 두개골 파열로 즉사하였으며 손구용 동지는 두개골 파열로 경상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산소 호흡기로 연명하다 저녁 8시 50분경에 운명하였다.
  • [프로필]
    1966년 경남 진양출생 1985년 경상대학교 행정학과 입학 1991년 경상대학교 사회과학대 부학생회장 1991년 진양군 농촌활동 도중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 1993년 진양군 농민회 협동사업국 영업부장 1994년 2월 1일 김순복 동지와 함께 서울 농민대회 참석 도중 도로에서 참사, 병원으로 옮겨 입원 중 운명
신연숙 사진
  • 이름: 신연숙
  • 당시 나이: 0
  • 정권과 한국토지공사의 반민중적 정책으로 인해 단 한 평의 삶의 보금자리마저 빼앗길 위험에 처한 수원2지구 철거민들은 1994년 12월 세입자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95년 골리앗을 건립하여 8월부터 150여일간 고공농성을 전개해왔으며, 9월달 한국토지공사의 강제철거에 맞서 수지 2지구 철거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96년 2월 5일 백골단 200여명과 철거깡패 100여명이 골리앗에 기습적으로 진입하였다. 당시 골리앗 위에는 주민 4명과 학생 1명이 잠을 자고 있었는데 철거깡패들과 백골단들은 폭력을 휘두르며 골리앗에 올라왔고 그 과정에서 골리앗에 불이 붙었다. 백골단과 철거깡패들은 18M높이의 철탑이 화염에 휩싸인 채 5층 꼭대기 위에서 살려달라는 동지들의 외침은 아랑곳하지 않고 철거민들의 보금자리를 싹쓸이 철거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연숙 동지는 투신을 할 수밖에 없었고, 바로 운명하고 말았다.
  • [프로필]
    1994년 12월 4일 수원2지구 세입자 대책위 결성 1996년 6월 18일 철거반대 고공농성을 위한 골리앗 설치 1996년 9월 5일 한국토지공사의 강제철거에 맞서 사수투쟁 승리 1996년 2월 5일 한국토지공사 철거깡패와 공권력 동원, 골리앗에 방화자행. 불을 피하기 위해 18미터 높이의 골리앗에서 투신하였으나 운명
양용찬 사진
  • 이름: 양용찬
  • 당시 나이: 25
  • 제주도를 끔찍이 사랑했던 양용찬 동지는 89년 서귀포 나라사랑 청년회에 가입하여 낮에는 타일공으로 일하면서 청년회 내의 '농민사랑' 모임의 구성원으로 활동을 하였고, 그 후 농민사랑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동지는 '서귀포지역 문제 대책위' 에 참가하여 서귀포 지역 개발 문제, UR과 제주도 개발 특별법, 농수산물 수입개방 및 지역 감귤문제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91년 11월 7일, 양용찬 동지는 '세계의 관광지 제2의 하와이보다는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서 생활의 보금자리로서 제주도를 원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특별법 저지","민자당 타도"를 외치며 분신하였다.
  • [프로필]
    1966년 제주도 남제주군 출생 1982년 2월 서귀포 고등학교 졸업 1985년 3월 제주대학교 인문대 사학과 입학 1987년 군입대로 휴학 제대 후 복학하지 않고 자진 중퇴 1989년 서귀포 나라사랑 청년회 가입 1990년 UR반대와 제주도개발 특별법 반대투쟁 1991년 11월 7일 서귀포 나라사랑 청년회 옥상에서 "제주도 개발 특별법 저지"등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 투신 제주도 서귀포 신례리에 안장
오원진 사진
  • 이름: 오원진
  • 당시 나이: 40
  • 오원진 동지는 충남대에 입학하여 민주화 요구 시위로 구속되어 감옥생활을 하였으나, 출감한지 채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84년에 흩어져 생활하던 동지들을 한자리에 모일 수 있도록 충남민주화운동연합을 결성하였다. 정권의 숱한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민청을 지켜나간 동지는 민중교회 야학, 가톨릭노동청년회, 가톨릭농민회, 가톨릭청년회, 기독청년회 등 지역 청년운동을 선도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항상 대중과 함께 하고자 하였고, 운동적 시각을 한시도 버린 적이 없었으며, 운동하는 친구들이 도식적이고 소아병적인 경직된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현실적이지 못한 것을 참으로 안타까워했던 동지를 뵤면서 많은 사람은 감동을 받았다 한다. 그러나 1992년 9월 11일 암과의 투병을 안타깝게 운명하고 말았다.
  • [프로필]
    1952년 3월 18일 충북 청원군 출생 1973년 충남대학교 입학 1975년 유신헌법 철폐 시위 주도로 제적 1980년 유신정권 붕괴로 복교 충남대학교 학생회장 역임 유신잔당 퇴진, 노동 3권 보장 등 민주화 요구 시위로 구속, 투옥 1985년 충남민주화운동 청년연합 초대의장 1987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사회운동 공동의장 1992년 9월 11일 충남대 부속병원에서 암으로 투병 중 운명
오한섭 사진
  • 이름: 오한섭
  • 당시 나이: 28
  • 오한섭 동지는 81년 새마을 청소년 경진대회 낙농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축산기술이 뛰어났고, 잘 사는 농촌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81년 영농후계자 자금 200만원을 받아 한우를 길렀으나, 당시 전경환 새마을 운동본부에서 외국소와 쇠고기 수입을 하자, 소값이 폭락하게 되었고, 밀리는 사료값을 갚기 위해 계속 소를 팔이 급기야는 85년 11월에 송아지 14마리를 팔아 밀린 사료값 500만원을 갚자 5마리의 송아지밖에 남지 않았다. 오한섭 동지는 논밭 한뙤기 없는 처지에서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다. 농협 빚 420만원도 갚아야 하고 많은 가족의 생계도 책임져야 하는 동지는 영농 후계자가 된 것을 후회하였다. 농민의 생산결과에 대해서는 무책임한 정부의 영농정책에 분개하여 '용기! 패기! 사기! 빚! 빚! 420만원'이라는 마지막 글을 남기고 음독하여 3일만에 운명하였다. 그의 죽음은 살농정책으로 인한 농촌파탄에 대한 정부의 영농정책에 대한 항의였다.
  • [프로필]
    1958년 충남 아산 출생 1975년 천안 농업고등학교 축산과 졸업 아산군 인주면 청년회장 영농후계자 회장 역임 1986년 3월 10일 농촌 경제를 파탄시키는 정부의 영농정책에 항의하여 음독 1986년 3월 13일 운명
이덕인 사진
  • 이름: 이덕인
  • 당시 나이: 28
  • 이덕인 동지는 인천시가 휴식공간 목적으로 군사보호시설 지구 철조망을 제거하자 95년 7월 3일부터 장애인 22명, 빈민 20명과 함께 노점을 시작했고, 이에 구청에서 수차례에 걸쳐 노점 철거를 지시하자 그들은 철탑망루를 설치하여 대항하였다. 11월 24일 드디어 경찰병력과 용역깡패 1,500여명이 포크레인으로 강제 철거를 시작하자 시장면담을 요구했으나 강제로 시청밖으로 끌려나왔고, 망루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이덕인 동지는 25일 7시 30분경 망루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행방불명되었고, 아암도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시신은 밧줄로 손이 앞으로 가지런히 묶여 있었고 양쪽 팔과 얼굴부위에 상처로 간주된 피멍이 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4급 장애인이라는 힘겨운 신체 조건하에서도 노점생활로 기반을 꾸리고 이덕인 동지는 현정권과 인천시 당국의 대책없는 노점철거로 인해 살해된 것이다.
  • [프로필]
    1967년 12월 전남 신안군 출생 1995년 6월 아암도에서 노점 시작 1995년 11월 25일 노점 철거에 반대 농성중 실종 1995년 11월 28일 오전 10시 철거 감시용 망루에서 농성 중에 있던 이석근씨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이범영 사진
  • 이름: 이범영
  • 당시 나이: 39
  • 이범영 동지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위대한 사상가도, 뛰어난 경세가도, 불세출의 지략가도 아니었다. 더더구나 천재의 광휘가 번뜩이는 타고난 글쟁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건설하고, 의장을 지냈으며,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외 의장을 역임하는 등 개인의 안일과 욕망을 뒷전으로 밀쳐 놓고, 이 사회와 세계를 뒤바뀌고자 했던 활동가였다. 그러나, 안타깝게 1994년 8월 12일 담도암으로 운명하고 말았다.
  • [프로필]
    1955년 강원도 원성군 출생 서울고등학교 졸업 1973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입학 1976년 12월 유신반대 시위주도로 구속, 항소심에서 2년6개월 선고받음 1979년 7월 형집행 정지로 출감, '전국 병역대책위원회'를 조직, 위원장으로 활동 1984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집행국장 1988년 민청련 의장 1990년 전국 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 의장 1992년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의장 1994년 8월 12일 담도암으로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이오순 사진
  • 이름: 이오순
  • 당시 나이: 68
  • 1985년 경원대에 다니던 막내아들 송광영 동지가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학원안정법 철폐하고 전두환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분신하여 운명한 뒤 이오순 동지는 서울 기독교병원에서 화마와 싸우면서도 조국의 자주화와 민주화, 통일을 부르짖는 아들 광영과 조국의 어머니로 살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민주화를 위한 여러 투쟁에서 '감동의 황색 가죽가방'으로 불리우며 백골단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동지는 1991년 유가협 부회장직을 수행하며 회원 조직화에 앞장서다 강경대 동지 치사 경관 공판 도중 부당한 공판에 항의하다 법정소란 혐의로 1심에서 1년 6월동안 수배생활을 하였다. 94년 문익환 목사님의 서거로 충격을 받고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끼다 결국 심장병으로 운명하여 문익환 목사님과 아들이 묻힌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 [프로필]
    1926년 전남 광주 출생 1985년 막내 아들 송광영 동지 분신으로 운명 1989년 유가협 회원으로 활동 1991년 전국민주화 유가족 협의회(현 전국민족 민주유가족협의회) 부회장 역임 강경대 동지 치사경관 공판 도중 부당한 판결에 항의하다가 1년 6개월 수배생활 1993년 송광영 동지 묘역을 마석모란공원으로 이장함 1994년 1월 2일 문익환목사 장례식에 참여하고 충격받음 1994년 1월 26일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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