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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규 사진
  • 이름: 이철규
  • 당시 나이: 24
  • 89년 5월 10일 광주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얼굴이 검게 변색되고 입가에는 혈흔이 있고 온몸에 구타 흔적과 멍이 든 참혹한 모습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조선대 교지인 [민주조선] 편집위원장으로 이 교지에 '북한의 혁명과 건설'이라는 논문을 게재,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지명수배된 조선대생 이철규 동지였다. 이후 증인과 조사과정에서 드러난 점들을 정리하면, 5월 3일 행방불명될 시 잠복근무하던 경찰관들에 의해 검거된 것이 거의 확실하며, 그 이후 사체로 발견되기까지의 행방은 알 수가 없으나, 사체의 상태로 보아 수사기관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경찰은 끝내 사건의 은폐에만 혈안이 되어 각종 증거를 조작하고 범국민대책위원회의 활동을 억압하여 아직도 사인은 밝혀지고 있지 않다.
  • [프로필]
    1965년 5월 6일 전남 장성 출생 1982년 조선대학교 전자공학과 입학 1985년 11월 14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2년형을 선고 받음 1987년 7월 8일 가석방, 3학년으로 재입학 1989년 4월 '민주조선' 발간에 관련, 수배 1989년 5월 3일 행방불명 1989년 5월 10일 변사체로 발견됨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이한열 사진
  • 이름: 이한열
  • 당시 나이: 21
  •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던 이한열 동지는 연세대학에 입학하여 광주시민 학살에 대한 사진 전시회, 비디오를 보면서 그리고 학교집회에 참석하면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사회의 무풍지대에서 살아왔던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이한열 동지는 86년 2학기부터 실천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현실의 중심부에 뛰어들었다. 동지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름 중 "烈"자가 매울 열이라면서 자신과 최루탄은 불과분의 관계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또 이름의 끝 글자가 같은 김주열군과 자신을 비교하곤 했다. 어쩌면 동지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1987년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리고 그 곳에 참가한 동지는 그 투쟁 속에서 SY-44 직격 최루탄에 피격당하고 쓰러졌다. 이한열 동지의 피격사건은 전국으로 알려졌으며 학생, 시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해 궐기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거대한 87년 6월항쟁의 함성으로 이어졌다.
  • [프로필]
    1966년 8월 29일 광주출생 1973년 광주 동산국민학교 입학 1979년 광주 동산중학교 입학 1982년 광주 진흥고등학교 입학 1986년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영학과 입학 동아리 "만화사랑"에서 활동 1987년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결의대회" 에 참석, 시위 도중 연세대 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직격 SY-44 최루탄에 피격당해 쓰러짐 1987년 7월 5일 새벽 2시 5분 세브란스 중환자실에서 뇌손상으로 27일 동안 처절하게 투병하다가 운명 1987년 7월 9일 "애국학생 故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 거행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이형관 사진
  • 이름: 이형관
  • 당시 나이: 25
  • 군산대 신문 편집장을 맡고 있던 이형관 동지는 94년 체계조차 서 있지 않은 전대기련 전북지부를 일궈내었던 일꾼이었으며, 자기 삶과 사업에 진지한 청년이었다. 쓰러지기 전까지도 원광대 신문사에 가해지는 탄압에 힘들어하는 후배들을 걱정했다. 신문사의 주인으로 서지 못하는 신문사 기자들을 안타까워했고, 대학언론을 탄압하는 주간교수들에게 분노했던 동지는 1997년 9월 3일, 서울에서 회의 후 다급한 마음으로 입과 손의 떨림에도 불구하고 전북 원광대로 향하였고, 그 과정에서 버스터미널에서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이후 동지는 19일동안 의식불명 상태로 홀로 싸우다 21일 운명하였다.
  • [프로필]
    1973년 경기도 성남 출생 1992년 2월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졸업 1992년 3월 군산대학교 수학과 입학 1994년 군산대학교 신문 편집장, 14기 전국대학신문사기자연합회 전북지부장 역임 1995년-1996년 전북지부 집행부역임 1996년-1997년 전대기련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 1997년 9월 3일 새벽, 과로로 쓰러져 뇌수술 받음 21일 새벽 1시 20분경, 19일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가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장재완 사진
  • 이름: 장재완
  • 당시 나이: 22
  • 방위병으로 근무 중이던 장재완 동지는 귀가 도중 민족민주운동의 중요 문건과 책자가 든 가방을 분실하였고, 이것이 보안대에 넘겨진 사실을 알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을 동지들과 조직을 자신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막을 결심을 하였다. "... 본인의 중대한 과오로 인해 조직을 보위하기 위해, 나의 육체적 생명을 단절합니다. 우리의 혁명과 투쟁이 너무나 순결하고 숭고한 것이기에 나의 희생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나의 생명이 다할지라도 혁명을 향한 민중들의 투쟁은 더욱더 가열차게 격렬해질 것입니다..."는 내용의 유서를 부산대 총학생회로 보내고 자결하여 87년 3월 27일 야산에서 등산객에 의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 [프로필]
    1965년 7월 17일 경남 진양 출생 1980년 2월 부산 대성중학교 졸업 1983년 2월 부산 동인고등학교 졸업 1983년 3월 부산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입학 1985년 12월 3학년 마친후 휴학 1986년 1월 19일 방위병 입대 1987년 3월 23일 귀가 중 버스에서 중요문건이 든 가방 분실 1987년 3월 27일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 운명
장현구 사진
  • 이름: 장현구
  • 당시 나이: 26
  • 13대 대통령 선거의 정치적 혼란과 재단이 바뀌면서 기업화된 학원 운영과 이에 따른 파행 운영으로 각종 비리와 부정에 가득찬 학원의 비정상적인 운영에 종지부를 찍고 진정 이나라 백년지대계를 위한 학원으로 만들겠다는 의연한 자세로 당시 경원대학교 제9대 총학생회 학원자주화 추진위원장으로서 자주학원 건설을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투쟁했던 장현구 동지는 정부의 시녀로 전락해버린 학교 당국으로부터 터무니없는 고소, 고발로 같이 활동하던 몇몇의 간부들과 같이 성남 경찰서에 고발당하였다. 얼마후 구속 영장도 없이 잠복중이던 성남 경찰서 소속 전담반 형사들과 10여명의 정사복 경찰들에게 폭력적인 방법으로 연행당한 동지는 이 과정에서 고문수사를 하여 정신적 충격을 받게 하였다. 3개월이라는 기간동안 구속 수감되면서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가 몇차례 자살을 기도하였고, 결국 1995년 12월4일 분신, 운명하였다.
  • [프로필]
    1969년 서울 출생 1988년 대원 고등학교 졸업 1989년 경원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 입학 1990년 카톨릭 학생회 회장, 공대 학생회 활동 1991년 공대 학생회 학원 자주화 추진위원장 1992년 11월 총학생회 제1기 학원자주화 추진위원장 대통령 공정선거감시단 활동 중 폭력 연행후 가혹, 고문수사 당함 1993년 2월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으로 출소 1993년 3월 부정입시관련 비상학생총회 중 교수, 직원에 의한 집단구타당함 1993년 4월 이후 정신과 입원 치료 (3차례 자살 기도) 1995년 12월 4일 서울 송파동 송파 사거리에서 분신 (전신 80%,부분 3도화상) 1995년 12월14일 10일 간의 투병 끝에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정법영 사진
  • 이름: 정법영
  • 당시 나이: 18
  • 정법영 동지는 1973년 청주지역에 도시산업선교가 시작될 무렵 중학생으로 사회선교와 현실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978년 3월 노동자들은 퇴직금문제로 장기적인 농성을 전개하는 과정이었으며 농민 소작인 중 한사람이 토지를 매입하려는 과정에서 뭇매를 맞고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노동자와 농민들은 단식 농성으로 맞서 투쟁하였고 동지도 같이 투쟁에 참여하면서 경찰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이러한 민중생존권 수호를 위한 궐기 과정에서 113일이 경과되도록 문제 해결이 안되자 심리적 갈등을 겪던 정법영 동지는 정체불명의 친구들을 몇 번 따라다니며 술을 먹은 적이 있는데 78년 7월 4일에도 정체불명의 친구들과 만난 후 청주 성가의원에 혼자 가서 약을 먹었다면서 치료를 해달라고 했다. 병원에서 가족에게 연락이 와서 가보니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이후 5일간을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7월 8일 운명하였다.
  • [프로필]
    1960년 6월 충북 청원군 출생 청주 주성중학교 졸업 1977년 청주신학대학교 입학 1978년 3월 17일 청주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신흥제분, 조광피혁 노동자들과 함께 목숨을 건 4개월 간의 단식투쟁 7월 8일 청주신학교 2학년 재학중에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괴한들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함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정성묵 사진
  • 이름: 정성묵
  • 당시 나이: 17
  • 1990년 6월 4일, 충남 공주고 2년에 재학 중이던 정성묵 동지는 "나의 희생으로 우리 학교에서 우리 학교의 교육방법이, 나아가서는 우리나라의 정책에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라는 내용의 유서 5장을 남기고 기숙사에서 음독자결하였다. 당시 동지의 종아리와 등에는 멍든 자국이 있었다.
  • [프로필]
    1973년 출생 1989년 충남 공주고등학교 입학 1990년 6월 4일 교육방법의 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음독사
정성희 사진
  • 이름: 정성희
  • 당시 나이: 20
  • 국민학교 때는 전교 어린이 회장에 뽑힐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었으며 고등학교 때부터는 남달리 독서를 많이하여 문학적 소양이 풍부하였고 비교적 과묵하고 조숙한 학생이었던 정성희 동지는 일차 문무대 훈련 당시 시위를 선동, 노래 선창으로 문교부 리스트에 기록되어 강제징집을 당하여 군 복무 중인 82년 7월 23일,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군 당국측에서는 철책 초소 보초경계 근무 중 총기자살로 통고했으며, 유가족에게 자살 동의서를 날인받은 후 간단한 영결예배를 마치고 고양군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하였다. 동지는 유서는 없었고, '또 백양로를 걸어보고 싶다. 죽음 앞에서 내가 이렇게 담담하다니. 윤희(동생)야 네가 배운 지식을 가난하고 병들고 눌린 자들을 위하여 활용해라'라는 낙서 쪽지를 가지고 있었다.
  • [프로필]
    1962년 1월 출생 1981년 연세대학교 영독불계열 입학 1981년 11월 25일 시위관련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음 1981년 11월 28일 강제징집됨 1982년 1월 4일 자대 배치 이후 학원소요 관련자로 지속적인 감시를 받아옴 1982년 7월 23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조성만 사진
  • 이름: 조성만
  • 당시 나이: 24
  • 조성만 동지는 광주항쟁 8주기를 맞이하던 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구내 교육관 4층 옥상에서 할복, 투신했다. 당시 명동 천주교회 청년단체 연합회(명청연) 소속 가톨릭 민속연구회장이었던 조성만 동지는 '양심수 전원 석방 및 수배자 해제 촉구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던 오후 3시30분 무렵 교육관 옥상에 나타나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분단 상황 고착화하는 미제놈들 몰아내자' '올림픽 공동 개최하여 조국 통일 앞당기자' '광주학살 진상규명 노태우를 처단하자' '양심수 전원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5장의 자필 유서를 뿌리고 자신의 배를 찌른 뒤 거꾸로 투신했고, 즉시 백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두개골 손상으로 운명하였다. 동지는 이후에 일어난 통일운동을 대중적으로 전개하는 계기를 자신의 죽음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 [프로필]
    1964년 12월 전북 김제군 출생 1983년 전주 해성고등학교 졸업 1983년 재수 당시 명동성당 청년연합회 소속 가톨릭 민속 연구회 가입 1984년 서울대학교 자연대 화학과 입학 2학기 휴학 1985년 2월 군입대 1987년 12월 구로구청 항쟁시 구류 10일 가톨릭 민속연구회 회장 1988년 5월 15일 오후 3시 30분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양심수 석방하라,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치고 할복, 투신, 오후 7시 30분 운명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진성일 사진
  • 이름: 진성일
  • 당시 나이: 22
  • 진성일 동지는 중산계층의 여유있는 분위기에서 효성과 형제애가 지극한 장남으로 자랐고, 군입대를 계기로 사회적 인식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12·12 총선에서 특정인과 특정정당에 대한 편파적 흑색선전과 민정당 지지를 강요하자 군에서의 교육에 거부감을 품게 된다. 이를 계기로 5공의 정통성과 도덕성에 대해 심한 반감을 품고 복학한다. 1986년 애학투련의 건대 농성투쟁에서 '황소진압작전'이라는 살인적 테러로 학생들을 진압하고 관제언론에서는 공산혁명분자의 난동이라고 왜곡보도하는 속에서도 침묵뿐인 산업대 학우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86년 11월 5일 "건국대 농성사건에 즈음하여"와 "산대 학우에게"라는 유서를 뿌리고 이 시대의 침묵과 어둠을 사르려 분신, 투신하였다.
  • [프로필]
    1964년 1월 26일 부산 출생 1982년 2월 동래고등학교 졸업 1982년 3월 경성대학교(구 부산산업대학교) 법정대학 행정학과 입학 1986년 11월 5일 '건국대 농성사건 해명, 군부독재타도, 미제국주의 축출'의 유서를 뿌리고 시청각관 5층에서 분신·투신 경성대학교 교정에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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