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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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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원 사진
  • 이름: 진철원
  • 당시 나이: 20
  • 경원대는 91년, 최원영 재단이 새롭게 들어서면서 고질적인 사학비리와 95년 108명 제적 등 무리한 학생 징계, 고발로 사회적 물의를 빚어왔는데, 95년 12월4일 분신 운명한 고 장현구 동지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이 4달 남짓한 상황에서 벌어진 연속적인 분신운명으로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었다. 당시 경원대는 학교당국에 대한 고 장현구 동지 명예회복 요구과정에서 총학생회장, 부학생회장을 비롯한 6명이 제적, 8명이 무기정학, 2명이 유기정학을 당하는 한편 7명의 학우들에 대한 고발 및 공권력 투입으로 95년 총학생회장이 구속을 당하고 나머지 6명의 학우들은 수배상태에 놓여 있었다. 진철원 동지는 고교선배인 고 장현구 동지의 분신운명과 동아리, 학과의 선배동지들이 제적, 고발 등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 최원영 재단의 살인적 학원운영에 항거, 분신운명하였다.
  • [프로필]
    1976년 1월 4일 출생 1995년 2월 대원고등학교 졸업 1995년 3월 경원대학교 도시계획학과 입학, 민족사 연구회 '얼' 활동 시작 1995년 8월 잠시 동아리 활동 중단 1995년 12월 장현구 선배의 사인 진상규명과 명예획복 투쟁이 전개되고 있을 때 다시 활동 시작 1996년 4월 6일 밤 총여학생회실에서 분신, 운명
천세용 사진
  • 이름: 천세용
  • 당시 나이: 20
  • 주경야독을 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아온 천세용 동지는 [한얼] 만평기자 및 못다한 미술학도의 꿈을 '한얼 민족사 연구회'를 통해 이땅의 현실에 고민하게 되었고 "과학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므로 의식과 실천은 변증법적으로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확신을 변혁운동을 통해 담보해 내려는 노력을 펼쳐 나가다 5월 3일 침체된 학원자주화 투쟁에 불을 당기고자 했다. 동지는 당일 국기 게양대 앞에서 "6월 경원대 단결 투쟁 노태우정권 타도하자."고 외치며 분신 투신하여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운명하였다.
  • [프로필]
    1971년 5월 서울 출생 1990년 동북고등학교 졸업 경원대학교 전산과(2부) 입학 1990년 3월 경원대학교 민족사 연구회 '한얼'에서 활동 1991년 5월 3일 오후 3시경 '강경대 학우 폭력 살인자 행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위한 결의대회'도중 분신 후 투신하여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최덕수 사진
  • 이름: 최덕수
  • 당시 나이: 20
  • 1988년 5월 18일 오전11시경 최덕수 동지는 "광주항쟁진상규명", "국조권 발동"을 외치며 시계탑 앞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병원에서도 "광주는 아직도 살아있다", "나는 괜찮으니 돌아가서 투쟁하라"고 동료에게 당부하며 분신 9일만에 운명하였다. 87년 민중의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선거(12월)와 국회의원 선거(88년 4월)를 거치면서 정국은 여소야대로 치달으며 각 당의 당리당략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즉 6월 항쟁에도 불구하고 "광주항쟁의 진상규명" "삼청교육대" "언론탑압" "5공화국의 부정비리(6공도 포함)" "전두환ㆍ이순자의 부정비리 소환조사 구속" 등의 진상규명은 허공에 떠 버린 뜬 구름이었다. 이러한 기회주의와 당리당략적인 모습을 보며 최덕수 동지는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고통속에서도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일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 [프로필]
    1968년 전북 정주시 출생 1987년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법학과 입학 '서도회'써클 가입, 활동 '호남향우회'회장 역임 '동학운동사 연구회'가입, 활동 1988년 1학기 가정형편으로 휴학 1988년 5월 17일 교내 광주영령 추모식에서 광주항쟁 성명서 낭독 1988년 5월 18일 시계 탑 앞에서 11시경 분신 1988년 5월 26일 한강 성심병원에서 분신 9일만에 운명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최성묵 사진
  • 이름: 최성묵
  • 당시 나이: 62
  • 선지자의 철저한 고독 속에 살다간 부산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이며 야당통합의 주역으로 활동한 최성묵 목사는 대학시절 한국기독학생총연맹에서 활동하면서 서서히 사회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고 부산YMCA 총무로 피선되었다. 그러나 당시 강한 보수성을 띄고 있던 부산 YMCA는 목사에게 한계를 느끼게 했고, 이에 중부교회에 들어가 46세의 나이에 목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중부교회를 통해 부산민주화운동을 더욱 확대해나갔고, 1980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결성하여 6·10항쟁을 이끌어내는 선두주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 이후 목사는 우리 사회에서 자활의 기회를 박탈당한 장애인에게 동등한 한 인간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위한 운동의 저변확대를 위해 한울장애자 자활센터를 건립하고, 한울 장애인 어린이집을 개원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92년 지병으로 운명하였다.
  • [프로필]
    1930년 11월 11일 경북 영일군 출생 1951년 포항 중고교 1회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대 수학과 3년 수료, 한국 신학대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1976년 1월 1일 중부교회 전도사취임, S.C.M (K.S.C.F 전신) 총무 역임 V.S.I.S 부산 학생과장 역임 미공보원 부산 Y.M.C.A 총무, 부산 N.C.C.회장 (유신반대투쟁, 10월 부마항쟁주도) 국민연합공동 의장 1985년 6월 20일 한울장애인자활센터 창립 1990년 7월 2일 한울장애인어린이집 개원 구 신민당 최고위원 역임 1992년 3월 21일 지병으로 운명
최온순 사진
  • 이름: 최온순
  • 당시 나이: 0
  • 학생운동에 헌신해 온 최온순 동지는 83년 3월 29일 시위예비음모 혐의로 5명의 학우와 함께 경찰에 연행되어 1주일간의 조사를 받은 후 강제징집 되었다. 83년 8월 14일, 군에서 최온순 동지의 집으로 급위독이라는 전보를 보내와 가족들이 급히 부대에 가보니 이미 동지의 사체는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었다. 이에 가족들은 자살할 리가 없다는 확신을 갖고 영안실에서 1주일간이나 재수사 및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이에 군 수사대는 재수사를 하여 고참병과의 말다툼 끝에 피살되었다고 수정 발표, 자살의 오명은 벗겨지고 대전 국군묘지에 시신을 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납득하기 힘든 의문점이 많이 남겨져 있는 동지의 죽음에 다른 강제징집자의 경우처럼 녹화사업을 담당하는 보안대가 개입되었는 지에 여부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
  • [프로필]
    1981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81년 3월 동국대학교 수학교육학과 입학 1983년 3월 29일 시위예비음모로 경찰에 연행되어 일주일 조사 후 강제징집 1983년 8월 14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대전 국군묘지에 안장
최우혁 사진
  • 이름: 최우혁
  • 당시 나이: 21
  • 대학시절 독재의 억압에 항거하는 스크럼의 대열에 있었고 공장활동을 경험하며 진정한 민중해방운동을 준비했던 최우혁 동지는 1987년 9월 8일 부대 내의 쓰레기 소각장에서 분신하여 국군 덕정병원으로 이송 중 운명하였다. 헌병대는 개인적 고민에 의한 자살이며 유서와 그에 준하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육군 과학수사연구소는 일방적인 부검을 시행되었고, 부검결과 왼쪽 손목에는 길이 1.5센티미터, 너비 1밀리미터, 깊이 3밀리미터 정도의 음푹패인 상처가 있었고, 동지의 내장도 깨끗이 비어 있었다는 것이다. 군대는 공동 식사를 하는 곳인데 동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여러 끼를 굶었다. 최우혁 동지의 죽음은 군 당국의 발표대로 개인적인 문제로 고민하다가 분신 자살한 것이 아니다. 군 당국의 허둥지둥하는 모습가운데서 각 사람의 말이 서로 맞지 않았으며, 의혹의 사실이 점점 드러나자 날치기 장례식을 해버리고 가족들에게 협박을 하였다.
  • [프로필]
    1966년 3월 4일 서울 출생 1984년 3월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입학 학생운동에 헌신중 수차례의 구류를 삶 1986년 5월 20일 학내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아 전치 10주의 부상 1987년 4월 28일 군입대 1987년 9월 8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운경 공원묘원에 안장
최응현 사진
  • 이름: 최응현
  • 당시 나이: 23
  • 최응현 동지는 한양공대 입학 후 학생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88년에는 전방입소 반대 특위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에 구속되어 11월에 집행유예로 출소하였다. 이후 총학생회 반미소위원장, 이철규열사 사인규명 노천단식 투쟁 등을 누구보다 앞장서 진행하였다. 동지는 가정형편상 다시 휴학과 복학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변혁운동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있다가, 1990년 11월 8일 한양대 교내 건물 옥상에서 민주화투쟁에 제대로 복무하지 못함을 자책하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하여 운명하였다.
  • [프로필]
    1969년 8월 29일 경북 울진군 출생 1984년 세종고등학교 졸업 1987년 한양대학교 섬유공학과 입학 1988년 6월 전방입소 반대투위 부위원장 활동 중 구속 1989년 복학 1990년 11월 8일 한양대학교 옥상에서 투신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최종철 사진
  • 이름: 최종철
  • 당시 나이: 23
  • 동지는 부산대로 진학하여 곧바로 학생운동에 헌신하였다. 학교시절 유신독재가 기승을 부리고 여차하면 긴급조치로 잡혀 들어가야 하는 그 암담한 시절에도 동지는 각종 써클을 조직하고 줄기차게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3학년 때인 1979년 10월 박정희 정권을 결정적으로 분쇄하는 역할을 했던 부마항쟁에 앞장섰다가 수배를 받게 되었다. 그후 수배의 몸으로 청주로 돌아와 학교와 청주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바삐 뛰며 동지들을 규합하였고 지칠 줄 모르고 정열적으로 활동하여 주위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러했던 동지는 80년 5월 쿠데타로 등장한 신군부세력 전두환 정권에 의해 구속되어 군사재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감옥생활에서도 가열찬 투사의 모습을 잃지 않았고, 1981년 5월 11일 출감하였으나 수배, 고문, 징역생활에서 얻은 병(신경통)과 싸우다가 출감 4개월도 채 안된 9월 1일 조국의 민주와 통일을 보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운명하였다.
  • [프로필]
    1958년 2월 8일 충북 청주출생 1977년 2월 청주고등학교 졸업 1977년 3월 부산대학교 공과대학 조선공학과 입학 1979년 10월 부마 항쟁 참여 1980년 6월 5·17 조치후 구속 3년 선고받고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1981년 5월 11일 대전교도소에서 출소 교도소 생활의 후유증으로 고생 9월 1일 오전 11시 30분 심장마비로 운명
표정두 사진
  • 이름: 표정두
  • 당시 나이: 24
  • 87년 3월 6일 표정두 동지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근처 하적장 부근에서 몸에 불을 붙힌 후 "내각제 개헌 반대, 장기집권 음모 분쇄, 박종철을 살려내라, 광주사태 책임지라"는 구호를 외치며 주한미대사관 앞으로 30미터 가량 달리다 쓰러졌다. 이후 응급실에서 뚜렷한 의식으로 "나는 호남대학을 다니다 돈이 없어 그만두고 신흥금속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다. 연락처와 유서는 인근 다방에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분신 당시 동지의 가방 속에는 "내각제 반대", "장기집권반대"라는 쪽지와 슐츠의 방한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신문뭉치 등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고인의 유해를 폭력으로 유가족과 민주인사들을 분리시키면서 화장하여 금강에 뿌렸다.
  • [프로필]
    1963년 4월 1일 전남 신안군 암태도 출생 1979년 대동고등학교 입학하여 1980년 독서회활동 하다 5·18 당시 정학당함 1983년 호남대학교 무역학과 입학. 군복무 중 미군에 대한 저항의식 지님. 1986년 복학했으나 비민주적 학사운용과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자퇴 1986년 5월 야학교사로 활동하면서 노동자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가지고 활동 1987년 2월 ㈜신흥금속에 입사 3월 6일 서울 세종로 미대사관 앞에서 분신 3월 8일 운명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한상근 사진
  • 이름: 한상근
  • 당시 나이: 26
  • 동지는 의협심이 강해 항상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으로 96년 일본의 독도 망언 이후 민족의 자존심과 자주권을 지키고자 일본 대사관 항의 방문시 홀연 대사관 담을 넘어 한국 청년의 기개를 보여 주기도 했다. 또한 작년 12월 경희대 김형찬 학우가 안기부 요원에 의해 불법연행 당해 경기도 대공분실에서 분신하였을 때 농성단에서 15일 이상 활동을 하였고 날치기 노동 악법, 안기부법 철회 투쟁에 항상 앞장서기도 하였다. 동지는 97년 용인대가 '대학종합평가'를 받게 됨에 따라 총학생회 학원자주화 추진위원회 산하 '대학종합평가인정제소위'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학교당국과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 결국 2월 10일 새벽 4시 30분경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호소하기 위하여 분신했다.
  • [프로필]
    1971년 전북 김제 출생 1990년 금산상고등학교 졸업 1991년 대한체육과학대학교 (현 용인대학교) 격기학과 입학 1994년 농촌문제연구회 '흙사랑' 활동 1995년 용인대학교 9대 동아리연합회 부회장 1996년 '흙사랑' 회장, 총학생회 정책국장 일본의 독도망언 항의차 일본대사관 항의 방문 중 일본 대사관 넘어감 불구속 처리됨 1997년 동아리연합회 회장 역임 김형찬 대책위 농성단 활동 '대학종합평가인정제 소위원회' 위원 1997년 2월 10일 04시 30분 분신 1997년 2월 13일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에서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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