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민주항쟁
| 작성자 | 민주공원 | 작성일 | 2026-08-06 | 조회수 |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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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1987년 12월에는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국민은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 방식에서 벗어나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이는 내 손으로 민주정부를 세우겠다는 전 국민적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1987년 4월 13일,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고 기존 헌법을 고수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당시는 이미 1월에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박종철(당시 21세,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 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드러나 민심이 극도로 악화한 시점이었습니다.
여기에 6월 9일 이한열(당시 20세,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이 ‘6·10대회(박종철 군 고문살인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직격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자 국민의 분노가 증폭했습니다.
마침내 6월 10일, ‘박종철 군 고문살인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시작으로 29일까지 전국에서 국민이 거리로 나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습니다.
![]() 가톨릭센터 농성을 결의!
1987.6.16.
소장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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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루탄을 쏘는 전경에게 항의하는 시민들
1987.6.17.
소장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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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부산은 서울을 능가할 정도의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6월 10일 남포동, 광복동 등지에서 수많은 시민이 쏟아져 나와 범국민대회를 열고, ‘독재타도’를 외치며 늦은 밤까지 경찰과 치열하게 맞섰습니다. 대규모 가두 시위로 폭발한 부산의 열기는 경찰의 삼엄한 봉쇄 속에서도 끈질긴 게릴라 시위를 전개하게 했습니다.
서울의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된 15일에도 부산 시민들의 결속력과 저항 에너지는 오히려 최고조에 달하며 전국 6월민주항쟁의 가장 치열한 중심지로 타올랐습니다. 6월 16일, 부산 지역 학생과 시민들은 대청동 가톨릭센터로 진입하여 농성에 돌입했습니다. 이 농성은 6월 22일까지 6박 7일간 이어졌으며, 가톨릭센터는 단순한 농성장을 넘어 부산 시민들이 항쟁의 소식을 접하고 지지를 보내는 ‘민주주의의 광장’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센터 앞 도로에는 연일 수십만 명의 시민이 운집하여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습니다.
부산에서 전개된 6월민주항쟁의 특징은 대학생뿐만 아니라 이른바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직장인과 일반 시민들이 대거 동참했다는 점입니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에는 시청 앞 광장과 서면 일대에서 수십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어 개최된 26일의 평화대행진은 신군부 정권이 무력 진압을 포기하고 6·29선언을 발표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시민의 힘으로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며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6월민주항쟁이 이끌어낸 6·29선언에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비롯하여 언론자유, 지방자치, 대학 자율화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6월민주항쟁은 평범한 시민들이 참여한 4·19혁명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저항이었으며, 이후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