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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민주화운동

작성자 민주공원 작성일 2026-08-06 조회수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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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의 연대, 5·18민주화운동과 부산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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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의거 사진전’ 포스터
1987.6. 
기증 박승원, 소장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5·18민주화운동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 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신군부의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중항쟁으로 규정합니다. 그런데 좀 더 넓게 보면, 1979년 12·12군사반란과 1980년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전후하여 발생한 신군부의 내란 및 정권 찬탈 행위에 대항해, ‘광주’뿐 아니라 ‘광주 밖’ 전국의 시민들이 연대하여 전개한 내란 저지 투쟁이자 민주화운동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1979년 12·12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민주화 인사를 검거하고 국회를 봉쇄했습니다. 이에 저항하여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를 계엄군이 잔혹하게 진압하자, 분노한 시민들이 가세하며 거대한 항쟁으로 발전했습니다. 시민들은 ‘시민군’을 조직하여 신군부의 폭력에 맞섰으나, 5월 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무력 진압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남긴 채 종결되었습니다.


당시 신군부는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여 5·18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왜곡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광주 외 지역 사람들은 한동안 진실을 파악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항쟁의 진실은 구전과 외신, 지하 유인물 등 치열한 활동을 통해 서서히 전파되었습니다. 서울, 경기, 부산, 경남, 대구, 경북, 충청, 전북, 강원 등 전국 각지의 대학생과 시민, 노동자들이 가두시위와 유인물 배포 등을 통해 신군부의 만행을 규탄하며 적극적으로 연대했습니다.


이는 19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을 추동하는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습니다. 특히 5·18민주화운동은 국민의 생명을 짓밟은 정권의 부도덕성을 폭로하며, 청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에 투신하게 만든 기억의 원천이었습니다.


‘5·18광주의거 사진전’을 보기 위해 길게 늘어선 대기줄
‘5·18광주의거 사진전’을 보기 위해 길게 늘어선 대기줄
1987.6.
기증 박승원, 소장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5·18광주의거 사진전’을 관람하는 시민들
‘5·18광주의거 사진전’을 관람하는 시민들
1987.6.
기증 박승원, 소장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산 지역과 5·18민주화운동은 저항의 연대라는 측면에서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습니다. 부산에서도 신군부는 5·17비상계엄 확대 조치와 함께 예비검속으로 수십 명을 구금했습니다. 이에 저항하는 시위를 계획하고 유인물을 배포하는 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경찰과 계엄군의 삼엄한 경계로 시위가 전개되지는 못했으나 부산의 운동가들은 일본 TV 방송이나 구전으로 실상을 파악한 뒤, 신군부의 만행을 알리는 유인물을 도심에 살포하며 광주와의 연대를 시도했습니다.


특히 1982년 발생한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은 5·18민주화운동의 학살을 묵인한 미국의 책임을 묻고 강요된 망각에 저항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1987년 6월민주항쟁 직전 부산가톨릭센터에서 열린 ‘5·18광주의거 사진전’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운집하여 학살의 진실을 목격했습니다. 이들의 도덕적 각성은 부산이 6월민주항쟁의 중심지로 거듭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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