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부마민주항쟁
| 작성자 | 민주공원 | 작성일 | 2026-08-06 | 조회수 |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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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철폐, 독재타도, 언론자유 : 1979년 부마민주항쟁
![]() 온천장을 통과하는 시위대
1979.10.16.
생산·기증 김탁돈, 소장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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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경찰서 앞을 통과하는 학생들
1979.10.16.
생산·기증 김탁돈, 소장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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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장기 집권을 획책하며 1972년 유신헌법을 공포했습니다. 유신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고 대통령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했기에 이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거셌으나, 정권은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폭력적으로 억압했습니다. 이에 1970년대 ‘유신 시대’를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공화국’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결국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반독재 민주항쟁의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된 ‘유신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은 순식간에 부산 시내 각 대학가와 시민들에게 확산됐습니다. 그리고 시위는 인근 마산에까지 들불처럼 퍼졌습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부산에 비상계엄을, 마산에 위수령을 선포하며 강경 진압에 나섰습니다.
![]() 부산교육대학 앞 사거리에서 경찰과 충돌한 학생들
1979.10.16.
생산·기증 김탁돈, 소장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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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계엄군
1979.10.
생산·기증 김탁돈, 소장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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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민중의 거센 저항은 유신 체제 내부의 균열을 불러왔고, 항쟁의 처리 방안을 둘러싼 권력 내부의 갈등 끝에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유신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주화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12·12군사반란으로 등장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짓밟았고, 이는 1980년 5월 18일 광주의 비극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은 1960년 4·19혁명 이후 19년 만에 처음으로 광범위한 대중이 거리 시위에 직접 참여한 민중항쟁이었습니다. 그것은 5·18민주화운동을 거쳐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민주주의의 승리를 가져온 출발점이었습니다.
![]() 부산교육대학 앞 사거리에서 경찰과 충돌한 학생들
1979.10.16.
생산·기증 김탁돈, 소장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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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신문사와 부산MBC 정문을 경비하는 계엄군
1979.10.
생산·기증 김탁돈, 소장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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